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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자동차 회사에서 리콜 여부를 심사하는 일을 합니다. 스웨덴산 고급 가구로 집을 채우고, 유명 브랜드 옷만

고집하지만 삶은 텅 빈 것처럼 느껴집니다.

밤마다 잠들지 못하는 불면증에 시달리던 그는 병을 앓는 사람들의 모임에 몰래 참석하며 위안을 얻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순간에만 겨우 잠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행기에서 우연히 타일러 더든이라는 남자를 만납니다.

비누를 만든다는 이 남자는 자유분방하고 사회의 규칙 따위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집에 돌아온 주인공은 자신의 아파트가 폭발로 사라진 걸 발견하고, 갈 곳 없는 처지가 되어 타일러에게 연락합니다.

두 사람은 함께 살기 시작하고, 어느 날 서로를 때려보자는 제안으로 지하 술집에서 첫 싸움을 벌입니다.

이 우연한 주먹다짐은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가며 파이트 클럽이라는 비밀 모임으로 커집니다. 처음엔 몇 명이 모여 서로를 때리던 이 모임은 이내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한 조직으로 변해갑니다.

여기에 마를라 싱어라는 여자가 등장하면서 세 사람의 관계는 점점 더 기묘해집니다. 조직은 어느새 폭력을 넘어 사회를

향한 파괴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고, 주인공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걸 서서히 깨닫습니다.

그가 뒤늦게 알게 되는 진실은 이 영화를 처음 본 순간부터 완전히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 볼 때보다 오히려 결말을 알고 다시 봤을 때 더 흥미로운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행동과 대사들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반전을 알고 나면 재미가

사라지는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다시 확인하고 싶어지는 영화라는 점도 파이트클럽의 독특한 매력입니다.


내 안의 타일러

이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저는 소비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의 이야기로 더 크게

다가온다고 느낍니다.

주인공은 가구 카탈로그를 넘기며 다음엔 어떤 소파를 살지 고민하는 장면에서 자신이 원하는 게 아니라 카탈로그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타일러는 그런 그에게 정반대의 삶을 제안합니다. 소유가 아니라 파괴를, 안정이 아니라 혼란을 택하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다른 작품들이 자꾸 겹쳐 보입니다.

세븐이 외부의 악을 쫓는 이야기였다면, 이 영화는 그 악이 사실 내 안에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찾아줘에서 닉과 에이미가 서로에게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려 애썼던 것처럼, 이 영화의 주인공 역시 세상이 원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하다가 결국 그 포장 밑에서 완전히 다른 자아를 폭발시키고 맙니다.

많은 사람들이 타일러를 통쾌한 반항아로 기억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가 주인공이 억누르고 있던 가장 위험한 충동이

실체화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타일러의 말이 꽤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물건에 지배당하지 말고 남들이 정해놓은 성공의 기준에서도 벗어나라는 그의 말에는 분명 통쾌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자유는 점점 다른 얼굴을 드러냅니다. 자신을 억압하던 규칙에서 벗어나자고 외쳤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타일러가 만든 새로운 규칙에 아무런 의문 없이 복종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타일러가 더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자유를 이야기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 존재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의 안에도 어느 정도는 이런 타일러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 영화를 오래도록 섬뜩하게 만듭니다.

에드워드 노튼은 무기력함과 광기 사이를 오가는 얼굴을 섬세하게 연기하고, 브래드 피트는 그 반대편에서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관객마저 매혹시킵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의 대비가 있었기에 훗날 밝혀지는 진실이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고 생각합니다.


파괴는 자유일까

파이트클럽1999년 개봉 당시 기대만큼 좋은 흥행 성적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홈비디오와 DVD 등을 통해 새로운 관객층을 만나면서 재평가됐고, 지금은 데이비드 핀처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자 199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컬트 영화로 꾸준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저는 개봉 당시보다 시간이 흐른 뒤 더 높은 평가를 받게 됐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당시보다 이후의 관객들에게 더 강하게 읽힌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파이트 클럽은 처음엔 억눌린 개인들이 잠시나마 자기 자신을 되찾는 해방구처럼 보입니다. 직장과 소비, 사회가 정해놓은 성공의 기준에서 벗어나 맨몸으로 서로 부딪치면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감각을 확인합니다.

하지만 조직이 커질수록 그 안에서도 규칙과 위계가 생기고 개인은 다시 이름 없는 부속품으로 전락합니다.

저는 이 아이러니가 이 영화의 진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든 것이 또 다른 억압이 되어버리는 순간을 영화는 냉정하게 지켜봅니다.

그래서 타일러의 행동을 단순히 체제에 저항하는 멋진 반항으로만 받아들이기에는 불편한 부분이 있습니다.

소비사회에서 벗어나겠다고 시작한 행동이 폭력과 파괴로 변하고, 자유를 찾아 모인 사람들이 또 다른 지도자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한다면 그것을 과연 자유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저는 파이트클럽이 타일러의 철학에 답을 주는 영화라기보다 오히려 그 철학이 어디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소비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파괴로 채우려 했던 주인공처럼, 각자 다른 방식으로 텅 빈 마음을 채우려 애쓰며 살아갑니다.

물건을 사고, 일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며 내가 누구인지 확인하려 합니다. 영화가 나온 지 20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이 이야기가 낡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현재 시청 가능한 OTT는 서비스 계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감상 전 이용 중인 플랫폼에서 파이트클럽의 제공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고 있다고 확신하시나요. 아니면 어딘가에 나만의 타일러를 숨기고 계신가요.

정답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저는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게 만든다는 것만으로도 파이트클럽은 여전히 유효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영화가 정말 묻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면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가 아니라, “누군가가 정해준

삶에서 벗어난 뒤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