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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아서 플렉은 광대 분장을 하고 거리에서 일하는 남자입니다.
그는 감정과 무관하게 발작적으로 웃음이 터지는 증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병원에서 상담을 받고 약을 처방받지만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습니다.
늙은 어머니를 부양하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그의 꿈은 코미디언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웃음도, 그의 존재도 진지하게 바라봐주지 않습니다.
고담시는 쓰레기 파업으로 거리가 엉망이 되고 빈부 격차는 점점 벌어집니다. 아서는 그 도시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하철에서 자신을 조롱하던 세 남자를 총으로 쏘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서의 삶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복지 예산 삭감으로 상담과 약 처방이 끊기고, 그가 믿고 있던 관계와 진실도 하나씩 무너집니다.
그리고 그 모든 균열의 끝에서 아서는 서서히 조커가 되어갑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터져 나오던 웃음도 점점 다른 의미를 갖기 시작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런 존재감도 없었던 한 사람이 조커라는 이름을 얻어갈수록 오히려 도시 전체가 그를 바라보기 시작한다는 점은 아이러니합니다.
결국 《조커》는 한 사람이 어떻게 악당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이런 질문을 남깁니다.
아서가 조커가 된 것은 어느 한순간의 선택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오랫동안 쌓여온 수많은 균열의 결과였을까요.
그가 웃는 이유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자꾸 걸리는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결말부 아캄의 상담실 장면입니다.
영화는 지금까지 우리가 본 아서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마지막까지 확신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이미 영화 속에서도 아서가 현실이라고 믿었던 관계가 실제와 달랐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의심하게 됩니다.
우리가 본 것 중 어디까지가 사실이었을까.
이 불확실함이 《조커》를 단순한 빌런의 탄생 이야기보다 더 흥미롭게 만듭니다.
아서의 웃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그의 웃음은 자신의 의지로 멈출 수 없는 고통에 가깝습니다.
웃고 있지만 즐겁지 않고, 오히려 웃음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오해받고 조롱당합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웃음의 의미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자신을 괴롭히던 웃음이었다면 어느 순간부터 아서는 그 웃음을 자신의 일부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특히 광대 분장을 한 채 계단을 내려오며 춤을 추는 장면은 흔히 해방의 순간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 장면이 불안하게 느껴졌습니다.
자유로워진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처음 만났던 아서 플렉은 거의 사라져 버린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해방처럼 보이는 장면이 동시에 한 사람이 완전히 무너진 순간처럼 보인다는 것.
그 이중적인 느낌 때문에 계단 장면이 단순히 멋진 장면으로만 기억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웃음을 통제하지 못했던 사람이 마지막에는 웃는 얼굴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조커》에서 웃음은 단순한 증상이나 캐릭터의 특징이 아니라 아서가 세상과 맺는 관계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장치처럼 느껴집니다.
우리는 무죄일까
《조커》가 지금 다시 봐도 불편한 이유는 아서의 광기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에게서 지원이 사라지고, 가난한 사람은 쉽게 조롱받으며, 사람들의 관심은 자극적인 사건에 몰립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아서는 점점 더 고립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아서의 폭력을 정당화한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상처받았다는 사실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권리가 생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 때문에 《조커》가 불편합니다.
아서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있으면 그가 왜 무너져가는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선택한 폭력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책임은 어디까지 아서 개인에게 있고, 어디부터 그를 방치한 사회에 있을까요.
저는 영화가 어느 한쪽만 범인으로 지목하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아서를 조롱했던 사람들, 그를 이용했던 사람들,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도 손을 내밀 수 없었던 시스템.
수많은 작은 균열이 한 사람의 삶에 쌓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선택을 하는 사람 역시 결국 아서 자신입니다.
그래서 《조커》를 보고 나면 불쌍한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라는 단순한 구분만으로는 아서를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오히려 더 불편한 질문이 남습니다.
한 사람을 무너뜨린 책임은 어디까지 개인의 것이고, 어디부터 그를 둘러싼 사회의 것일까요.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영화를 바라보고 있던 우리 역시 완전히 바깥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에게 《조커》가 오래 남는 이유는 조커라는 악당의 탄생보다, 그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본 뒤에도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 쉽게 답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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