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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1770, 프랑스의 외딴섬입니다.

젊은 화가 마리안느는 백작 부인의 의뢰를 받고 이 섬으로 향합니다. 부인의 딸 엘로이즈의 결혼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입니다.

문제는 엘로이즈가 초상화 그리는 것을 완강히 거부한다는 사실입니다.

초상화가 밀라노 귀족과의 원치 않는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한 도구로 쓰인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리안느는 결국 화가라는 신분을 숨기고 산책 친구인 척 엘로이즈에게 접근합니다. 낮에는 함께 걷고 대화를 나누며

그녀의 얼굴과 표정을 관찰하고, 밤에는 기억 속 모습을 되살려 몰래 캔버스에 옮깁니다.

매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관찰하는 사이, 두 사람 사이에는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서서히 자라납니다.

이 섬에는 두 사람 외에도 하녀 소피가 함께 지내고 있는데, 그녀 역시 자신만의 사정을 안고 있습니다.

백작 부인이 며칠간 자리를 비운 사이 세 여자만 남겨진 집에서는 신분과 규칙을 잠시 내려놓은 듯한 짧은 자유의 시간이 흐릅니다.

이들은 함께 요리를 하고 책을 읽으며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모닥불이 타오르는 밤에는 다른 여성들과 함께

노래를 듣는 특별한 순간도 경험합니다.

신분도 목적도 잠시 잊은 채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이 며칠은 언젠가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의 끝자락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기억하는 방법을 찾아갑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관찰하며 시작된 관계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누가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지 그 경계마저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마주 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남는 인상은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그리기 위해 몰래 관찰하던 시선이 어느 순간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바뀐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 지점이 이 영화를 다른 로맨스 영화들과 구분 짓는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그려지는 사람의 관계는 보는 사람과 보이는 사람으로 나뉘기 마련입니다.

처음의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역시 그렇습니다. 한 사람은 상대를 관찰하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이 관찰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가까워지면서 이 관계는 달라집니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바라보고 있었다면 엘로이즈 역시 마리안느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결국 화가만 상대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모델 역시 화가의 표정과 행동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저는 이 장면들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꽤 특별한 방식으로 보여준다고 느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보이는 것만큼이나 그 사람을 자세히 바라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화가 났을 때

짓는 표정이나 당황했을 때의 작은 행동처럼 다른 사람은 지나칠 수 있는 모습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이 작품에서 전통적으로 영화 속 여성을 바라보던 시선과 다른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고 기억하는 관계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저는 제목의 초상이라는 단어도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처음에는 마리안느가 그리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두 사람이 서로의

기억 속에 남긴 모습 역시 또 하나의 초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남았던 부분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를 이야기하는 장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데려올 수 있었지만 뒤돌아보지 말라는 약속을 어겨 결국 영원히 헤어지게 된 이야기입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왜 오르페우스가 뒤돌아봤는지를 두고 서로 다른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이 대화가 영화의 후반부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처럼 느껴졌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하는 것과 마지막 모습을 자신의 기억 속에 남기는 것. 영화는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어떤 사랑은 함께하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끝난 뒤에도 서로를 기억하는 것으로 남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총평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2019년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각본상을 받았으며, 같은 해 칸에서 퀴어종려상도

수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의 가치를 수상 경력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화려한 사건이나 빠른 전개보다 두 사람의 시선과 표정, 침묵에 집중하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대사보다 정적이,

설명보다 표정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다소 느리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이 침묵과 여백이 두 사람의 감정을 훨씬 진하게 전달한다고 느꼈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였던 표정과 행동이 하나씩 의미를 갖기 시작합니다.

특히 영화가 끝난 뒤 다시 떠올려보면 초반의 여러 장면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그때는 몰랐던 시선과 표정의 의미를 뒤늦게 이해하게 되는 경험도 이 영화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말 역시 모든 감정을 대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이 더 강렬했습니다. 한 사람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동안의 사랑과 기억, 상실의 감정이 한꺼번에 전달됩니다.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영화 초반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끊임없이 바라봤던 시간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처음에는 사랑하기 위해 바라봤고, 마지막에는 기억하기 위해 바라봅니다.

저는 이 영화 전체가 결국 그 두 시선 사이의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현재 국내에서는 넷플릭스, 왓챠, 티빙 등을 통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다만 OTT 작품은 서비스

계약에 따라 제공 여부가 변경될 수 있으므로 감상 시점에 이용 중인 플랫폼에서 한 번 더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잔잔하지만 오래 마음에 남는 사랑 이야기를 찾고 있다면 한 번쯤 감상해 볼 만한 작품입니다. 빠른 전개나 극적인

사건보다 인물의 감정과 관계를 천천히 따라가는 영화를 좋아한다면 더욱 잘 맞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도 한동안 마지막 장면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사랑이 끝난 뒤에도 한 사람을 기억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 그리고 때로는 함께했던 시간보다 마지막으로 바라본 한순간이 더 오래 남을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저에게 단순한 사랑 영화라기보다, 사랑이 지나간 뒤에도 사람의 기억 속에 무엇이 남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로 기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