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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취업

tvN 드라마 언더커버 미스홍1990년대 세기말 증권가를 배경으로, 엘리트 증권감독관이 신입사원으로 위장 취업하면서 벌어지는 레트로 오피스 코미디입니다.

박신혜가 연기하는 홍금보는 서른다섯 살의 엘리트 증권감독관입니다.

대형 증권사의 수상한 비자금 흐름을 추적하던 그는 사건의 실체를 밝혀내기 위해 스무 살 신입사원 홍장미로 신분을 위장해 증권사에 잠입합니다.

잘 나가던 감독관이 하루아침에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사원이 되어야 한다는 설정부터 재미있습니다.

직급도, 경력도, 나이도 숨겨야 하고 자신보다 경험이 부족한 사람에게 지시를 받아도 함부로 나설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이 설정이 단순히 박신혜의 코믹 연기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보면 서른다섯 살의 여성이 스무 살의 신입사원으로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한다는 설정 자체가 꽤 흥미롭습니다.

직장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그때 내가 지금 아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홍금보는 실제로 그 상황에 들어갑니다.

이미 조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고 사람을 보는 경험도 있지만,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사원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서 홍금보의 위장은 얼굴이나 이름을 바꾸는 것보다 자신이 쌓아온 경험과 위치를 숨기는 일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신입답지 않은 말투와 행동이 튀어나올 때마다 웃음이 만들어지지만, 그 웃음 뒤에는 직장이라는 곳이 사람을 직급과 나이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대하는지도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어제까지 누군가에게 지시하던 사람이 오늘은 복사와 심부름을 해야 하고, 옳지 않은 일을 발견해도 자신의 진짜 위치를 드러낼 수 없어 참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질문이 생깁니다.

똑같은 말을 감독관 홍금보가 했을 때와 신입사원 홍장미가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진다면, 그 차이는 말의 내용 때문일까요 아니면 말하는 사람의 직급 때문일까요.

저는 이 질문을 생각하면서 보면 언더커버 미스홍의 직장 코미디가 단순한 위장극 이상으로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홍금보에게 가장 어려운 임무는 비자금의 증거를 찾는 것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하는 것.

저는 그것이 이 위장취업 설정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기말 증권가

언더커버 미스홍에서 1990년대는 단순히 삐삐와 옛날 옷을 보여주기 위한 복고풍 배경만은 아닙니다.

특히 증권가라는 공간과 1990년대를 함께 놓았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 하나로 주가를 확인하고 정보를 검색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 정보가 순식간에 퍼지는 지금과 비교하면 누가 어떤 정보를 먼저 알고 있느냐가 훨씬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었던 시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비자금을 추적하는 이야기를 현재가 아니라 1990년대에 배치한 것이 꽤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직접 사람을 만나야 하고, 문서와 장부를 찾아야 하며, 누군가가 정보를 감추면 그것을 확인하는 데도 시간이 걸립니다.

홍금보가 직접 회사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이유 역시 이런 시대적 배경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PC통신 문화도 같은 맥락에서 흥미롭습니다.

지금은 SNS에 글 하나를 올리면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이 볼 수 있지만, 당시 PC통신은 익명의 사람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정보를 주고받기 시작하던 공간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보면 1990년대가 단순한 옛날이 아니라 정보가 권력이 되는 방식이 빠르게 바뀌기 시작한 시대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증권회사가 있습니다.

돈과 정보가 모이는 곳에서 비자금이라는 비밀을 추적하는 인물을 배치했기 때문에 레트로 배경이 단순한 장식에 머물지 않습니다.

직장문화 역시 지금과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강한 위계질서와 조직문화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던 부분이 많았습니다.

신입사원 홍장미가 겪는 일을 보면서 웃다가도 저런 일이 당연했던 시절이 있었지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레트로 감성은 마냥 아름다운 추억만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삐삐와 패션, 음악에는 향수를 느끼면서도 직장 안의 위계와 여성에게 요구됐던 역할에서는 지금과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대비가 오히려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1990년대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1990년대가 한 작품 안에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더커버 미스홍의 세기말 배경은 분위기를 위한 장식이 아니라 사건과 인물의 행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중요한 조건으로 보입니다.


두 개의 나

언더커버 미스홍에서 제가 가장 흥미롭게 보는 부분은 결국 홍금보와 홍장미가 사실 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홍금보는 이미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은 서른다섯 살의 전문가입니다.

반면 홍장미는 사회생활을 이제 막 시작한 스무 살 신입사원이어야 합니다.

한 사람 안에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가 동시에 존재하는 셈입니다.

여기에 고경표가 연기하는 신정우가 등장하면서 이 설정은 더 복잡해집니다.

신정우는 홍금보가 위장 취업한 증권사의 신임 사장이면서 과거 홍금보와 인연이 있었던 인물입니다.

저는 이 관계도 일반적인 재회 로맨스와는 조금 다르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옛 연인이 다시 만나는 이야기에서는 두 사람 모두 시간이 흐른 모습으로 재회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한쪽이 자신의 현재를 숨긴 채 훨씬 어린 사람을 연기합니다.

신정우는 눈앞의 홍장미를 보면서 자신이 알았던 홍금보를 쉽게 떠올리지 못할 수 있지만, 홍금보에게 신정우는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불러오는 사람입니다.

한쪽만 상대방의 과거를 알고 있는 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은 단순한 설렘보다 조금 더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홍금보는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 없기 때문에 과거에 하지 못했던 말을 쉽게 꺼낼 수도 없습니다.

반대로 홍장미라는 가짜 신분 덕분에 과거와는 전혀 다른 거리에서 신정우를 바라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 작품의 위장이 결국 홍금보 자신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장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가짜 인생이지만, 그 인생을 살아보면서 오히려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예전의 자신을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그때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지금 돌아간다면 무엇을 다르게 할지 생각하기도 합니다.

홍금보는 실제로 젊어진 것은 아니지만 스무 살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언더커버 미스홍은 범인을 잡기 위한 위장취업극이면서 동시에 한 여성이 젊은 시절의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제목의 언더커버도 이런 관점에서 재미있습니다.

처음에는 비자금을 밝히기 위해 신분을 숨긴다는 의미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홍금보가 감추는 것은 이름과 나이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경력과 감정, 과거의 관계까지 모두 숨겨야 합니다.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려는 사람이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가장 많은 것을 감추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작품의 중요한 순간이 홍금보의 정체가 언제 들킬까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위장이 끝난 뒤 홍금보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는가도 중요합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자신을 다시 바라보고 지금의 선택을 바꾸는 것은 가능합니다.

결국 언더커버 미스홍의 위장취업은 다른 사람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가짜 신분을 통해 진짜 자신을 다시 발견하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