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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펀드매니저 석우는 이혼한 아내와 떨어져 딸 수안과 함께 서울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일에만 몰두하는 석우는 딸의 생일선물조차 이미 사준 물건을 또 사줄 정도로 수안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수안은 그런 아빠에게 엄마가 있는 부산으로 가고 싶다고 말하고, 석우는 마지못해 딸과 함께 부산행 KTX에 오릅니다.
기차가 출발하기 직전, 몸 상태가 이상해 보이는 한 여성이 가까스로 열차에 올라탑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발작을 일으키고 자신을 도우려던 승무원을 공격합니다.
감염은 순식간에 퍼집니다.
평범했던 승객들이 하나둘 좀비로 변하고, 달리는 열차 안은 도망칠 곳조차 없는 생존의 공간으로 바뀝니다.
그 안에는 임신한 아내 성경을 지키려는 상화, 함께 부산으로 향하던 고교 야구부 학생들, 노년의 자매, 그리고 자신의 생존을 무엇보다 우선하는 용석 등 서로 다른 사람들이 타고 있습니다.
석우 역시 처음에는 다른 사람보다 자신과 딸의 안전만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낯선 사람들과 힘을 합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그의 태도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깁니다.
여기서부터 《부산행》은 단순히 좀비를 피해 도망치는 영화에서 조금씩 벗어납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위험해지더라도 다른 사람을 위해 문을 열고, 누군가는 자신이 살기 위해 그 문을 닫습니다.
정차하는 역마다 새로운 위험이 기다리고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 예측하기 어려운 것은 좀비가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의 선택입니다.
부산에 가까워질수록 살아남은 사람의 숫자는 줄어들고, 이들이 지켜야 하는 것도 단순한 목숨만은 아니게 됩니다.
결국 이 기차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동하는 교통수단인 동시에, 극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작은 사회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좀비보다 무서운 사람
《부산행》을 다시 보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좀비들의 행동이었습니다.
좀비들은 무섭지만 의외로 단순합니다. 감염되면 사람을 공격하고, 눈앞의 자극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들의 행동에는
계산도 명분도 없습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특히 김의성이 연기한 용석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이용합니다. 문제는 그가 공포 때문에
순간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한 인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불안을 자극하고, 누군가를 위험한 사람으로 몰아가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저는 바로 이 부분이 《부산행》의 좀비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좀비는 사람을 공격하지만, 용석은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을 공격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줍니다.
한 사람의 공포가 집단 전체로 번지는 과정도 흥미롭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조금 전까지 함께 있던 사람을 어느 순간 위험한 존재로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누군가를 밖으로 밀어내는 행동까지 합리적이라고 믿게 됩니다.
영화 속 감염은 좀비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닌 셈입니다.
바이러스가 사람의 몸을 감염시킨다면 공포와 이기심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판단을 감염시킵니다.
반대편에는 마동석이 연기한 상화가 있습니다.
상화 역시 처음부터 특별한 영웅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아닙니다. 거칠게 말하고 투덜거리기도 하지만 위험한 순간에는
계산보다 행동이 먼저 나옵니다.
그래서 상화와 용석의 차이는 단순히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의 차이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은 위기에서 자신의 생존 범위를 다른 사람에게까지 넓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범위를 계속 자기 자신에게로
좁힙니다. 그 사이에 석우가 있습니다.
영화 초반의 석우는 오히려 상화보다 용석 쪽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다른 승객보다 자신과 딸을 먼저 생각하고, 타인의
위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석우의 선택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그래서 《부산행》에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본 인물은 완벽하게 선한 상화도,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용석도 아닌
석우였습니다.
사람은 위기 앞에서 원래 어떤 사람인가 보다,,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가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여운
《부산행》의 후반부가 유독 슬프게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의 석우에게 부산은 단순한 목적지였습니다. 딸을 엄마에게 데려다주면 자신의 역할은 끝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기차 안에서 수많은 선택을 경험하면서 그는 조금씩 아버지로서 달라집니다.
특히 수안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영화를 다시 보면 석우의 변화가 더욱 선명하게 보입니다.
수안은 어른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다른 사람을 외면할 때 그것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인물입니다. 어린아이인 수안이 오히려 어른들에게 인간답게 행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계속 보여주는 셈입니다.
그래서 저는 《부산행》을 단순한 좀비 영화보다는 딸이 아버지에게 타인을 바라보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초반 석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일과 자신의 가족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을 향해 갈수록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범위가 조금씩 넓어집니다.
그 변화가 너무 늦게 찾아왔다는 점 때문에 마지막 선택은 더욱 아프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만약 내가 저 기차 안에 있었다면 누구처럼 행동했을까.
상화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몸을 던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용석처럼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도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실제로 극도의 공포 속에 놓인다면 나와 가족부터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히려 그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다는 점이 《부산행》의 가장 긴 여운이라고 느꼈습니다.
좀비가 등장하지 않는 현실에서도 사람은 자신의 이익과 타인의 위험 사이에서 크고 작은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부산행》의 공포는 열차에서 내리는 순간 끝나지만,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그 뒤에도 남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살아남는 것과 끝까지 인간답게 살아남는 것은 같은 의미일까.
저에게 《부산행》은 좀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준 영화라기보다, 극한 상황이 왔을 때 인간이 어디까지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결말을 이미 알고 다시 봐도, 좀비보다 사람들의 선택을 따라가게 되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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