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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지 못한 여자
영화 《미스백》을 보고 난 뒤 자세한 장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흐릿해졌지만, 이상하게 슬펐다는 감정만은 남아 있습니다. 한지민이 연기한 백상아라는 여자의 삶이 그만큼 안타까웠던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고, 세상에 마음을 열기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거칠게 살아온 여자. 누군가에게 기대는 법도, 따뜻한 말을 자연스럽게 건네는 법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 상아를 보면서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울까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평소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베풀 줄 안다는 말을 어느 정도 믿는 편입니다. 어린 시절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보호받은 경험이 있다면, 자신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그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내 편이 되어줬던 기억, 실수했을 때 용서받았던 경험, 힘들 때 따뜻하게 안아줬던 순간들이 결국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시간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경험이 거의 없었던 사람은 어떨까요.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으니 사랑을 베풀지 못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믿는 일부터 어려울 수는 있겠지요. 자신이 상처받지 않으려고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아온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마음을 여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상아의 거친 말투와 무심한 표정도 그런 관점에서 보면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 원래부터 차갑고 인정 없는 사람이라기보다, 따뜻하게 행동했다가 상처받는 일이 두려워 먼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렇다고 그녀의 모든 행동이 어린 시절의 상처로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누군가의 겉모습만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사랑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믿는 일이 너무 어려워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미스백》의 상아를 생각하면 그 말이 오래 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지켜주기 위해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이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프면서도 따뜻한 부분이라고 느낍니다.
외면할 수 없는 아이
상아가 만나는 어린 지은은 어른에게 보호받아야 할 나이에 오히려 어른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아이입니다. 집이라는 공간은 원래 아이가 가장 편안해야 할 곳입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가면 자신을 지켜줄 사람이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곳이지요. 그런데 지은에게 집은 그런 공간이 아닙니다. 아이를 보호해야 할 어른들이 오히려 아이를 위험에 빠뜨리고, 아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견디며 살아갑니다.
저는 아동학대를 다룬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아이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적다는 사실이 가장 마음 아픕니다. 어른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직장을 바꾸거나 관계를 끊거나 다른 곳으로 떠나는 선택이라도 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어른에게도 그런 선택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는 자신을 돌보는 어른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도 없고, 혼자 살아갈 방법을 찾기도 어렵습니다. 결국 자신을 지켜줘야 할 사람에게 삶을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지은을 상아는 외면하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아이를 구하겠다는 거창한 사명감이 있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상아는 다른 사람의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을 피하며 살아온 인물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지은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지나온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됩니다. 두 사람의 삶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보호받지 못한 아이가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상아는 다른 어른들보다 더 아프게 이해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이 듭니다. 같은 상처를 겪었다고 해서 반드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당했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되풀이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처럼 아픈 사람이 더는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상처를 겪었다는 사실보다 그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대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상아가 지은을 외면하지 못하는 모습은 그래서 더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자신도 충분히 보호받지 못했던 사람이 이제는 다른 사람을 보호하려 합니다. 누군가에게 배운 따뜻한 말이 많지 않아도, 적어도 이 아이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만큼은 분명했던 것입니다.
저는 《미스백》이 단순히 불쌍한 아이와 그 아이를 구해주는 어른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지켜주려는 상아 역시 누군가에게 지켜졌어야 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 그 생각을 하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집니다.
상처가 건넨 사랑
《미쓰백》을 생각하면 슬펐다는 감정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시간이 지나 영화 속 대사나 장면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해도, 어떤 영화는 보고 난 뒤의 감정만큼은 오래 남습니다. 제게 《미쓰백》이 그런 영화입니다. 그런데 다시 이야기를 떠올려보니 단순히 학대받는 아이가 불쌍해서만 슬펐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던 상아가 자신과 닮은 아이를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에도 마음이 쓰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대해 너무 쉽게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을 주면 된다고, 상처를 극복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랑받지 못한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 말이 얼마나 어렵게 들릴까요.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었다가 또다시 버림받을까 두려울 수도 있고, 좋은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상아가 지은을 지키려는 모습을 단순한 모성애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상아는 지은의 엄마가 아닙니다. 아이를 돌봐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이 아이만큼은 더 이상 겪지 않게 하고 싶어 합니다. 저는 바로 그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반드시 다정한 말을 잘하거나 따뜻하게 안아주는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위험한 상황에서 외면하지 않는 것, 다른 사람들이 모른 척할 때 그 사람의 편에 서주는 것도 사랑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상아가 지은을 지켜준다고 해서 상아의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은 역시 상아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동안 겪은 상처가 단번에 없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났다는 사실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순간, 적어도 한 사람은 자신의 편이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처음 가졌던 생각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베풀 줄 안다는 말입니다. 여전히 그 말에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쓰백》은 그 말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도 보여줍니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도 자신이 받지 못했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건넬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쉬워서가 아니라 얼마나 아픈 일인지 알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영화가 오래도록 슬프게 남는 이유는 상아와 지은이 서로를 만난 뒤의 이야기보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나기 전까지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쓰백》은 상처가 저절로 사람을 따뜻하게 만든다고 말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상처를 입은 사람이 그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되풀이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선택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 아프고도 아름다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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