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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

영화 그림자 아이는 언니와 함께 옥상에서 떨어진 뒤 3년 동안 의식을 잃었던 수안이 깨어나면서 시작됩니다.

박소이가 연기하는 수안이 눈을 떴을 때 사랑했던 언니 수련은 이미 세상에 없고, 추억이 가득했던 집에서도 떠나온 뒤입니다.

다정했던 엄마 금옥마저 무언가를 숨기는 듯 불안한 모습을 보이면서 수안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3년 전 그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은 언니 수련과 똑같은 얼굴을 한 재인이 나타나고, 수안은 언니에게 들었던 오래된 그림자 동화를 떠올립니다.

처음에는 흔히 볼 수 있는 도플갱어 미스터리처럼 보입니다.

죽은 사람과 똑같은 얼굴을 가진 존재가 나타났으니 재인은 누구인가가 가장 중요한 질문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오히려 왜 수안에게 언니와 똑같은 얼굴을 한 존재가 나타났을까라는 질문이 더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그 사람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익숙한 장소와 물건, 함께했던 기억 속에서 떠난 사람은 계속 다시 나타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재인은 단순히 수련과 닮은 기묘한 존재라기보다, 수안이 아직 떠나보내지 못한 언니의 기억이 실제 모습으로 나타난 존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도플갱어는 공포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상실을 보여주는 장치가 됩니다.

보통 도플갱어 영화에서는 나와 똑같이 생긴 또 다른 나가 내 자리를 빼앗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중심에 놓입니다.

하지만 그림자 아이는 방향이 다릅니다.

수안에게 두려운 것은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떠나보낸 사람과 똑같은 얼굴이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보고 싶었던 사람을 다시 만났는데 그 사람이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라면 어떤 감정이 먼저 들까요.

반가움일까요, 아니면 공포일까요.

저는 이 모순된 감정이 그림자 아이의 도플갱어 설정을 더 슬프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도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수안이 마주해야 하는 것도 바로 그 사실입니다.

사랑했던 사람을 닮은 존재를 붙잡는 것과 그 사람을 기억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의 서사

그림자 아이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장치는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그림자 동화입니다.

외로운 그림자가 꼭 닮은 두 아이를 찾아와 몸 하나를 달라고 요구한다는 이야기가 수안과 수련, 재인의 관계와 겹치면서 현실과 설화의 경계가 흐려집니다.

저는 이 동화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외로운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림자가 처음부터 악한 존재라기보다 외로움 때문에 누군가의 몸을 원한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설정은 영화 속 공포를 조금 다르게 보게 만듭니다.

무서운 존재가 단순히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나타난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잃고 그 빈자리를 채우려는 욕망에서 시작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잃은 뒤 그 사람을 되찾고 싶은 마음은 사랑에서 시작해도, 그 마음이 지나치게 커지면 남아 있는 사람의 삶까지 붙잡을 수 있습니다.

유은정 감독이 이 작품을 상실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고 밝힌 것도 이런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자매의 감정과 사랑을 장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장화, 홍련을 참고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두 작품 모두 가족의 기억과 상실이 공포의 형태로 현재를 흔든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림자 아이에서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서운 존재의 정체보다 같은 상실을 겪은 가족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슬퍼한다는 점입니다.

엄마 금옥과 수안은 같은 사람을 잃었습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슬퍼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기억을 붙잡고 싶어 하고, 누군가는 그 기억에서 멀어지고 싶어 할 수도 있습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상실을 똑같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같은 사람을 잃었기 때문에 서로의 슬픔이 더 이해되지 않는 순간도 생길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이 영화의 공포를 현실적인 감정과 연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면 영화 속 그림자는 초자연적인 존재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떠난 사람에 대한 기억과 죄책감, 말하지 못한 감정 역시 살아 있는 사람의 뒤를 계속 따라다니는 그림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림자 아이는 죽은 언니와 똑같이 생긴 아이가 나타나는 영화라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공포의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그 안에는 남겨진 사람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어떻게 모습을 바꾸어 돌아오는가라는 이야기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상실의 의미

그림자 아이를 보고 난 뒤 가장 오래 남는 질문은 재인은 누구인가보다 다른 곳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뒤에도 우리는 어떻게 다시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흔히 빈자리를 채운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자리를 정말 다른 사람이 완전히 채울 수 있을까요.

재인이 아무리 수련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도 수련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떠난 사람의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그대로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 영화가 빈자리를 채우는 것보다 빈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애도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수안의 변화도 언니를 잊는 과정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떠나보낸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기억까지 없애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남아 있어도 그 기억 때문에 자신의 삶까지 멈추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이별에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제목인 그림자 아이도 다르게 느껴집니다.

그림자는 빛이 있는 한 완전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평생 그림자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과거 역시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고 해서 그 기억이 앞으로의 삶 전체를 결정하도록 내버려 둘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제목 속 그림자가 바로 그런 의미와 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임수정이 과거 장화, 홍련에서 자매의 비극 한가운데 있던 배우였고 이번에는 딸을 잃은 엄마의 위치에 서 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같은 종류의 상실을 전혀 다른 세대와 위치에서 바라보게 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을 함께 본 관객에게는 또 다른 감정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림자 아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작품과의 연결보다 수안이 결국 어떤 선택을 하느냐입니다.

떠난 사람과 닮은 존재를 붙잡을 것인지, 아니면 그 사람의 빈자리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갈 것인지.

결국 이 영화가 보여주는 애도는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하면서도 살아가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림자 아이를 강한 공포나 반전만을 위한 영화라기보다 상실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어두운 동화로 보는 편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도 괴물의 정체보다 이 질문입니다.

떠난 사람을 잊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다시 앞으로 걸어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