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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의 세계

영화 지느러미는 남과 북이 통일된 근미래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디스토피아 SF 영화입니다.

하지만 통일 이후 더 나은 세상이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

환경오염으로 바다와 공기는 망가졌고, 오염된 바다를 차단하기 위해 한반도 주변에는 거대한 장벽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에는 인간과 조금 다른 존재들이 살아갑니다.

유전적 돌연변이로 몸에 지느러미가 생겨난 사람들, 이른바 오메가입니다.

오메가들은 인간에게 위험한 존재로 취급되면서도 독성 폐기물을 수거하는 위험한 노동에는 동원됩니다.

사회는 그들을 두려워하면서도 필요할 때는 이용합니다.

저는 이 설정에서 가장 먼저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바로 이 모순이었습니다.

정말 위험한 존재라면 왜 가장 위험한 일을 그들에게 맡기는 걸까요.

어느 날 오메가 한 명이 관리 구역을 이탈하고, 신입 공무원 수진은 그를 추적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오메가라는 정체를 숨긴 채 살아가는 미아를 만나면서 수진이 알고 있던 세계에도 조금씩 균열이 생깁니다.

처음에는 인간과 돌연변이의 대립을 다루는 익숙한 디스토피아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에서 더 중요한 질문이 오메가가 정말 위험한가 보다 누가 그들을 위험한 존재라고 결정했는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지느러미가 있다는 이유로 오메가를 자신들과 다른 존재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하기 싫은 위험한 노동은 그들에게 맡깁니다.

위험하다고 밀어내면서 동시에 필요하다고 붙잡아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메가는 단순한 돌연변이 생명체라기보다 사회가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방식을 보여주는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특히 수진이 흥미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수진은 처음부터 악의를 가지고 오메가를 괴롭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속한 사회가 이미 만들어놓은 규칙 안에서 자신의 일을 수행할 뿐입니다.

저는 오히려 이런 인물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차별은 언제나 노골적인 악의에서만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만들어진 규칙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때에도 차별은 계속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붉은 하늘과 검은 빗방울, 오염된 바다와 거대한 장벽이라는 기괴한 풍경 역시 단순한 SF적 볼거리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무너진 것은 자연환경뿐 아니라 인간이 다른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느러미의 디스토피아는 미래의 낯선 세계라기보다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구분을 조금 과장해서 보여주는 세계처럼 느껴집니다.


만들어진 공포

박세영 감독은 지느러미를 만들면서 차별받는 사람들이 사회의 프로파간다와 제도 안에서 어떻게 특정한 이미지로 만들어지는지를 생각했다고 밝혔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알고 나니 영화 속 오메가가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오메가에 대한 공포는 처음부터 존재했던 감정이라기보다 반복되는 이야기와 규칙 속에서 만들어진 감정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지느러미라는 눈에 보이는 차이를 기준으로 인간과 오메가를 나눕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질문이 생깁니다.

몸에 지느러미가 있다는 사실 하나가 그 사람의 위험성까지 증명해줄 수 있을까요.

차이는 그 자체로는 단순한 차이일 뿐입니다.

하지만 사회가 거기에 의미를 붙이는 순간 정상과 비정상, 보호해야 할 사람과 통제해야 할 사람이라는 경계가 만들어집니다.

영화 속 지느러미 역시 그런 낙인처럼 보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런 구분이 오래 반복되면 차별하는 사람조차 그것을 차별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점입니다.

오메가를 위험한 노동에 투입하면서도 착취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원래 위험한 존재들이니까라는 설명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가 오메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군가가 위험하다는 말을 반복하고, 그 말을 모두가 사실처럼 받아들이는 과정이 더 무섭게 느껴집니다.

영화 속 거대한 장벽도 이런 의미에서 다시 보입니다.

표면적으로 장벽은 오염된 바다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사회는 동시에 인간과 오메가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장벽을 세웁니다.

한쪽은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되고, 다른 한쪽은 감시하고 관리해야 할 존재가 됩니다.

결국 가장 견고한 장벽은 콘크리트 구조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머릿속에 만들어진 경계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공포는 그 경계를 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

사람은 두려워하는 대상을 쉽게 멀리합니다.

멀리한 대상에 대해서는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확인할 기회도 줄어듭니다.

그러면 편견은 더 오래 유지됩니다.

저는 지느러미가 보여주는 공포의 구조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워서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하기 위해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요.


경계 밖의 사람들

지느러미에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보는 변화는 수진이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를 직접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수진은 처음에는 오메가를 관리하고 추적하는 것이 자신의 업무라고 생각합니다.

그 규칙이 왜 존재하는지 깊이 고민할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직접 오메가와 마주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던 설명과 눈앞의 현실 사이에 틈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저는 바로 그 틈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편견이 깨지는 순간은 거창한 계몽 때문이 아니라 두려워했던 사람을 실제로 만나보는 순간에서 시작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인간만 오메가를 배척하는 단순한 구조에 머물지 않습니다.

차별받는 집단 내부에서도 다시 다른 경계와 배척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 지점 때문에 이야기는 더 불편해집니다.

피해를 경험했다고 해서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것은 아니고, 차별받았다고 해서 또 다른 차별을 만들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인간과 오메가라는 구분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떤 기준으로 바라보는가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목인 지느러미도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지느러미는 처음에는 그저 몸에 생긴 하나의 특징일 뿐입니다.

하지만 사회가 그 특징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한 사람의 정체성과 삶 전체를 결정하는 표식이 됩니다.

지느러미가 있어서 차별받는 것일까요, 아니면 차별하기 위해 지느러미라는 표식이 필요했던 것일까요.

저는 이 질문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 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느러미는 먼 미래의 돌연변이 이야기를 빌려 현재의 사회를 바라보게 만드는 영화에 가깝습니다.

영화 속 세상에는 인간과 오메가를 가르는 지느러미가 있지만, 현실에는 훨씬 더 많은 기준이 사람을 나눕니다.

문제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차이에 어떤 의미를 붙이느냐입니다.

결국 이 영화에서 가장 두려운 미래는 인간에게 지느러미가 생기는 세상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우리와 다른 사람이라고 밀어내는 일이 너무 익숙해져서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세상.

저는 지느러미가 보여주는 진짜 디스토피아가 바로 그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인간의 경계 밖으로 밀어내는 사회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