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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된 모텔

저는 반전 스릴러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결말을 알고 나서 다시 봤을 때 더 재밌는 영화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고 느껴왔습니다. 아이덴티티는 그 드문 예외 중 하나입니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사막 한가운데 있는 외딴 모텔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듭니다. 전직 경찰 출신 운전기사, 은퇴한 매춘부, 신혼여행 중인 부부, 사고를 낸 배우와 그 매니저, 그리고 낯선 소년까지. 서로 아무 연고도 없던 이 열 명은 폭우로 길이 끊기면서 이 모텔에 발이 묶이게 됩니다.

그런데 한 명씩, 정말 한 명씩 죽어나가기 시작합니다. 방문마다 붙어 있는 방 번호가 거꾸로 세어지듯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다음 희생자가 누구일지 예측할 수 없는 긴장감이 쌓여갑니다.

저는 이 설정 자체는 사실 그렇게 새롭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폐쇄된 공간에 갇힌 사람들이 하나씩 죽어나간다는 구조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에서부터 이어져 온 전통적인 미스터리 문법이니까요.

그런데도 이 영화를 끝까지 손에서 놓지 못했던 건, 각 인물들이 저마다 감추고 있는 사연들 때문이었습니다. 신혼여행 중인 부부는 겉보기와 달리 위태로운 관계였고, 배우와 매니저 사이에도 말 못 할 긴장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 낯선 사람들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을 지켜보는 재미만으로도, 저는 이 영화가 그저 그런 슬래셔물은 아니라는 걸 초반부터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열 명의 진실

그런데 이 영화가 저를 완전히 뒤통수친 건, 이 모든 설정이 사실 한 공간이 아니라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벌어지고 있었다는 결말이었습니다.

이 열 명의 인물들은 실제로는 사형을 앞둔 한 남자, 말콤 리버스가 가진 여러 개의 인격들이었습니다. 정신과 의사는 그에게 사형을 집행하기 전, 그의 안에 있는 인격들 중 살인을 저지른 진짜 인격을 찾아내려 하고 있었던 겁니다. 모텔에서 벌어지는 살인은 실제 사건이 아니라, 그의 인격들이 서로를 하나씩 지워나가며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인격이 누구인지를 가려내는 과정이었던 셈입니다.

저는 이 반전을 처음 알았을 때, 단순히 놀랐다기보다 그동안 봤던 장면들을 하나하나 다시 되짚어보고 싶어 졌습니다.. 각 방의 번호가 사실은 각 인격이 말콤의 삶에 등장한 순서, 즉 일종의 나이 순서를 의미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나면, 누가 먼저 죽고 누가 마지막까지 남는지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정교하게 설계된 순서였다는 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레베카 드모네이가 연기하는 정신과 의사가 마지막 순간까지 남았다고 믿었던 인격을 안심시키는 장면에서 벌어지는 두 번째 반전 역시, 저는 이 영화가 관객을 두 번 속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인상 깊었습니다. 첫 번째 반전으로 이미 충분히 놀랐다고 생각한 순간, 영화는 한 번 더 방심한 관객의 뒤통수를 노립니다. 저는 이 이중 반전 구조가 지금 봐도 상당히 영리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안의 여러 얼굴

저는 이 영화를 셔터 아일랜드나 파이트클럽과 자주 비교하게 됩니다. 두 영화 모두 결국 정신 질환이라는 소재를 반전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으니까요. 다만 저는 아이덴티티가 그중에서도 가장 과감한 방식을 택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두 영화가 한 사람의 내면을 은유적으로 그려냈다면, 이 영화는 그 내면을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열 명의 서로 다른 인물로 캐스팅해서 한 공간에 몰아넣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대담함이 지금 봐도 꽤나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도 여러 개의 얼굴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우리의 모습들이, 어쩌면 말콤의 인격들처럼 서로 다른 방에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다 보면, 이 영화가 단순한 장르적 트릭을 넘어 꽤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존 쿠삭은 이 혼란스러운 이야기의 중심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는 인물을 연기하는데, 저는 그가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나머지 인물들의 광기와 혼란이 더 선명하게 도드라졌다고 생각합니다.

반전 영화를 좋아하신다면, 저는 이 영화를 결말을 전혀 모른 채로 한 번 보시고, 그다음 방 번호와 인물들의 관계를 곱씹으며 한 번 더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두 번째로 볼 때 비로소 이 영화가 얼마나 치밀하게 설계됐는지 실감하게 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