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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속도

리틀 포레스트2018년 개봉한 임순례 감독의 작품으로, 일본의 동명 만화를 한국의 정서와 계절에 맞게 새롭게 각색한 영화입니다.

개봉한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다시 보면 화면이 오래됐다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빠른 컷 전환과 강한 색감에 익숙해진 요즘 콘텐츠와 비교하면 자연광을 살린 촬영과 담백한 색감이 더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영화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며 한 시골 마을의 풍경을 천천히 보여줍니다.

눈이 내려앉은 논밭, 여름의 짙은 초록빛, 가을의 수확 풍경처럼 계절이 바뀔 때마다 화면의 온도도 달라집니다.

특히 요리를 준비하는 과정을 길게 보여주는 장면은 단순히 음식을 맛있게 보이게 하기 위한 연출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재료를 씻고 자르고 불을 올리고 기다리는 시간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영화 전체의 호흡까지 느리게 만듭니다.

저는 리틀 포레스트의 영상미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혜원이 자기 속도를 되찾아가는 과정을 계절의 변화와 화면의 리듬으로 보여준다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서울에서 혜원은 시험과 취업, 관계처럼 끊임없이 결과를 요구받습니다.

하지만 고향에서는 씨를 뿌린다고 바로 수확할 수 없습니다.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흘러야 결과가 나타납니다.

사계절은 그래서 예쁜 배경이 아니라 혜원의 변화와 닮아 있습니다.

겨울이라고 해서 삶이 실패한 것도 아니고, 봄이 왔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연은 서두르지 않고 자기 순서대로 움직입니다.

혜원 역시 고향에 내려왔다고 갑자기 괜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먹고, 자고, 친구를 만나고, 계절을 보내면서 조금씩 자신의 상태를 돌아봅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느린 화면은 단순한 힐링 분위기를 위한 장식이 아닙니다.

빨리 결과를 내야 한다는 삶의 속도에서 잠시 벗어나도 된다는 것을 영화의 속도 자체로 보여주는 것에 가깝습니다.

리틀 포레스트의 영상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어쩌면 아름다운 풍경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까지 혜원과 함께 조금 천천히 살아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음식에 남아 있는 기억

혜원은 시험에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고 서울 생활에도 지친 상태에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처음부터 뚜렷한 계획을 세우고 내려온 것은 아닙니다.

말 그대로 잠시 도망치듯 돌아온 곳에서 혜원은 계절마다 나는 재료를 이용해 직접 밥을 만들어 먹으며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배추전과 막걸리처럼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음식들이 반복해서 등장하지만, 영화에서 음식은 단순한 먹거리 이상의 역할을 합니다.

혜원이 음식을 만들 때마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엄마입니다.

어릴 때 엄마가 해주던 요리를 직접 만들어보면서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엄마의 말과 행동을 조금씩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음식이 기억을 저장하는 방식이 흥미롭습니다.

사람의 얼굴이나 대화는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질 수 있지만 특정 음식의 냄새나 맛은 아주 오래 전의 기억까지 갑자기 불러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혜원에게 남긴 것은 단순한 요리법만은 아닙니다.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 한다고 똑같은 음식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혜원은 직접 재료를 만지고 실패하고 다시 만들어보면서 엄마에게 배운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갑니다.

이것은 엄마의 삶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과는 다릅니다.

엄마에게 받은 것을 가지고 자기 방식의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더 가깝습니다.

친구 은숙과 재하의 존재도 이 지점에서 중요합니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선택을 합니다.

누군가는 마을에 남고, 누군가는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오며, 혜원은 아직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누구의 선택이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골에 남았다고 성공한 삶이고 도시에 산다고 잘못된 삶인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남들이 정해놓은 기준보다 자신에게 맞는 삶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혜원이 직접 밥을 만들어 먹는 행동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서울에서 그녀는 계속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고향에서는 자신이 직접 재료를 준비하고 음식을 만들어 자기 몸을 먹입니다.

아주 사소해 보이지만 누군가의 평가나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리틀 포레스트의 요리는 먹방이나 향수를 위한 장면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음식은 혜원에게 엄마를 기억하게 하는 매개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을 다시 자기 손으로 돌보기 시작하는 방법입니다.

엄마의 손맛을 기억하며 시작한 요리가 어느 순간 혜원 자신의 손맛이 되어가는 것처럼, 혜원 역시 조금씩 자신의 삶을 만들어갑니다.


잠시 멈춰도 되는 이유

리틀 포레스트를 단순히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행복해지는 영화라고 보면 이 작품이 가진 의미를 놓치기 쉽습니다.

혜원이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는 새로운 인생을 멋지게 시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제대로 풀리지 않는 삶에서 잠시 도망쳐 온 것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 도망을 실패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이 영화가 주는 위로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흔히 힘든 일이 생기면 끝까지 버티는 것을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멈추거나 돌아가면 뒤처지는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계속 달리는 것이 언제나 앞으로 가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버티고 있다면 잠시 멈추는 것이 오히려 다음 방향을 찾는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혜원의 고민 역시 고향에 내려왔다고 갑자기 사라지지 않습니다.

밥 몇 번 만들어 먹고 아름다운 풍경을 본다고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 혜원에게는 당장 답을 내리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생깁니다.

그 시간 동안 자신의 몸을 돌보고, 친구를 만나고, 엄마를 다시 생각하고, 자신이 무엇 때문에 지쳤는지를 들여다봅니다.

엄마와 혜원의 관계도 이런 시선으로 보면 흥미롭습니다.

혜원은 엄마가 왜 자신을 두고 떠났는지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자신 역시 서울에서 힘든 시간을 보낸 뒤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엄마의 선택과 혜원의 선택이 똑같지는 않지만, 자신도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해 익숙했던 곳을 떠나보면서 과거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엄마의 마음에 조금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제목인 리틀 포레스트도 단순히 시골집을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작은 숲은 세상과 영원히 단절되어 숨어버리는 장소가 아니라 다시 밖으로 나가기 위해 잠시 머무는 곳일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시골집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혼자 보내는 하루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잠시 멈춘다는 사실보다 그 시간 동안 다시 움직일 힘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리틀 포레스트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당장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영화에 가깝습니다.

계절이 자기 순서를 건너뛰지 않듯 사람에게도 각자의 시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혜원에게 고향이 그런 시간이었듯 우리에게도 지쳤을 때 잠시 돌아가 숨을 고를 수 있는 작은 숲 하나쯤 필요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