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줄거리
극락도 살인사건은 2007년 개봉한 김한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1986년 아시안게임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야기는 목포 앞바다에서 토막 난 사람의 머리가 발견되면서 시작됩니다.
조사 결과 시신은 외부와 떨어진 작은 섬 극락도 주민의 것으로 밝혀지고, 경찰은 섬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사건이 벌어지기 전 극락도에는 열일곱 명의 주민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름만 들으면 세상 근심 하나 없을 것 같은 평화로운 섬이지만, 김노인의 팔순 잔치가 벌어진 다음 날 화투판에 함께
있었던 송전 기사 두 명이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덕수마저 자취를 감추고 또 다른 사건이 이어지면서, 평화롭던 섬은 순식간에 서로가 서로를 의
심한 공간으로 변합니다.
폭풍우 때문에 배편이 끊기고 통신마저 원활하지 않은 상황에서 주민들은 외부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섬 안에서 범인을 찾아야 하는데, 문제는 누구 하나 완전히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평소 가족처럼 지냈던 이웃조차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극락도라는 이름은 점점 역설적으로 들리기 시작합니다.
저는 처음 이 설정을 접했을 때 전형적인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를 예상했습니다.
외부와 단절된 공간, 한정된 용의자, 연이어 발생하는 살인이라는 조건만 보면 범인을 추리하는 데 집중하는 정통 미스터리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영화를 보고 나면 극락도 살인사건은 ‘누가 범인인가’를 맞히는 재미만으로 움직이는 영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더 흥미로운 것은 살인이 시작된 뒤 사람들이 변해가는 과정입니다.
어제까지 함께 밥을 먹고 웃던 사람이 오늘은 의심의 대상이 되고, 작은 행동 하나에도 숨은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살인사건 자체보다 의심이 공동체 안으로 들어왔을 때 평범했던 관계가 얼마나 빠르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저는 제목인 ‘극락도’도 재미있게 다가왔습니다.
처음에는 외부 세상과 떨어져 평화롭게 살아가는 섬이라서 붙은 이름처럼 보이지만, 사건이 시작되고 나면 그 이름이
오히려 잔인한 농담처럼 느껴집니다.
장소는 그대로인데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는 순간 천국 같은 섬이 지옥으로 변합니다.
결국 이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섬에 살인범이 있다는 사실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믿지 못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평범한 사람들까지 서로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 저는 이 부분이
극락도 살인사건을 단순한 범인 찾기 영화보다 더 흥미롭게 만드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웃음과 소름
극락도 살인사건을 두고 코믹 미스터리라고 소개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이 표현이 절반 정도만 이 영화를 설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섬 주민들의 능청스러운 사투리와 엉뚱한 행동, 심각한 상황에서도 불쑥 튀어나오는 대사들은 분명 웃음을 만듭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장면 바로 뒤에서 예상보다 잔혹하고 기괴한 상황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웃음과 공포 사이의 급격한 낙차가 이 영화의 가장 독특한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무서운 분위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하는 영화라면 관객도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극락도 살인사건은 일부러 긴장을 풀어놓은 다음 갑자기 불길한 장면을 밀어 넣습니다.
그래서 같은 잔혹한 장면이라도 더 당황스럽게 느껴집니다.
이런 방식은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심각한 사건 속에서 예상하지 못한 웃음을 만들어내고, 그 웃음이 끝나는 순간 다시 불편한 현실로 관객을
끌어당깁니다.
다만 저는 두 작품이 웃음을 사용하는 목적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인의 추억이 시대의 답답함과 수사의 무능함에서 씁쓸한 웃음을 끌어낸다면, 극락도 살인사건은 훨씬 더 기괴하고
노골적으로 웃음과 공포를 맞붙입니다.
그래서 순수한 코미디나 깔끔한 추리물을 기대하고 보면 다소 당황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블랙 코미디와 미스터리, 공포가 뒤섞인 영화라고 생각하고 보는 편이 이 작품의 분위기를 이해하기 쉽습니다.
박해일이 연기하는 보건소장 제우성 역시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주민들과 함께 사건의 실체를 쫓아가지만, 영화의 재미가 특정 주인공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지는 않습니다.
섬 주민 한 명 한 명이 저마다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짧게 등장하는 인물조차 수상한 구석을 하나씩 보여주기
때문에 누구를 믿어야 할지 계속 흔들리게 됩니다.
저는 이 점에서 섬 자체가 하나의 등장인물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정겹고 평화로운 공간이었지만 사람이 사라지고 의심이 쌓일수록 같은 골목과 같은 집도 전혀 다른 공간처럼
보입니다.
공간은 변하지 않았는데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관계가 변하면서 풍경까지 무섭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부분 때문에 영화의 다소 투박한 분위기도 오히려 장점으로 느껴집니다.
모든 장면이 세련되고 매끈하게 정리된 미스터리였다면 지금보다 평범한 작품으로 남았을 수도 있습니다.
조금 과하고, 조금 엉뚱하고, 웃어야 할지 긴장해야 할지 애매한 순간들이 있기 때문에 극락도 살인사건만의 이상한
맛이 생깁니다.
저는 그래서 이 영화의 장르를 하나로 규정하기보다 웃고 있는 동안에도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편한 영화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코미디와 공포가 서로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웃음 때문에 다음에 찾아오는 공포가 더 크게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총평
극락도 살인사건은 김한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보면 더욱 흥미로운 영화입니다.
김한민 감독은 이후 최종병기 활을 거쳐 명량, 한산: 용의 출현, 노량: 죽음의 바다처럼 규모가 큰 작품들을 연출했고,
특히 명량으로 천만 관객 감독이 됐습니다.
그런 감독의 출발점이 거대한 전쟁 영화가 아니라 작은 섬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인간의 의심과 광기를 들여다본 미스터리였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이후 작품들의 거대한 스케일과 비교하면 극락도 살인사건은 훨씬 작고 거칠지만, 제한된 공간에서 여러 인물의 감정을
한꺼번에 움직이는 연출에서는 이후 작품으로 이어지는 감독의 힘을 엿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특히 ‘큰 영화가 되기 전의 감독’을 보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완성된 스타일을 보여주는 영화라기보다 이것저것 과감하게 시도해 보는 데뷔작 특유의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어떤 장면은 과하고 어떤 부분은 다소 투박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비슷한 시기의 다른 미스터리 영화와 쉽게 섞이지
않는 개성이 생겼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범인을 알아내는 것만으로 모든 감정이 정리되는 작품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보통 추리 영화는 마지막에 진실이 밝혀지면서 앞선 혼란이 하나의 답으로 정리됩니다.
하지만 극락도 살인사건은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된 뒤에도 섬에서 벌어진 기괴한 분위기와 사람들의 모습이 오래 남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이 영화의 중심에 범죄보다 인간의 불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범인은 한 명일 수 있지만 의심은 한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습니다. 공포가 퍼지는 순간 평범한 사람도 누군가를 의심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며, 그 행동이 또 다른 사람의 의심을 만들어냅니다.
그렇게 보면 극락도에서 벌어진 일은 단순히 한 범죄자가 만든 비극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깔끔하게 정제된 미스터리를 기대한다면 다소 낯설 수 있습니다.
반대로 범인을 맞히는 것보다 인물들이 서로를 의심하며 무너져가는 과정, 코미디와 공포가 이상하게 붙어 있는 분위기,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튀는 전개를 좋아한다면 지금 다시 봐도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는 제목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극락’이라는 공간을 지옥으로 만든 것은 과연 살인사건 하나였을까요. 아니면 사건이 벌어진 뒤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된
사람들의 마음이었을까요.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제목이 오히려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가볍게 시작했다가 예상하지 못한 불편함과 소름을 느끼고 싶은 날이라면 극락도 살인사건은 한 번쯤 다시 꺼내볼 만한
한국 미스터리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완벽하게 정돈된 작품이라기보다 웃음과 공포, 미스터리와 블랙 코미디가 뒤엉켜 있기 때문에 오히려 시간이 지나도 쉽게 대체되지 않는 영화입니다.
현재 《극락도 살인사건》은 넷플릭스와 쿠팡플레이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OTT 제공 여부는 계약에 따라 변경될 수 있으니, 관람 전 이용 중인 플랫폼에서 한 번 더 확인해 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